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스티야 왕국 (문단 편집) === [[알폰소 7세]] === '''[[알폰소 7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카스티야 왕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아라곤 국왕 [[알폰소 1세(아라곤)|알폰소 1세]]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알폰소 7세가 자신이 무슬림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바쁜 사이 카스티야 전역을 석권해버리자 현실을 받아들여 1128년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의 경계를 확정지은 타마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알폰소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알폰소 7세는 우라카 치세 말년에 갈리시아를 침략하여 자기 영역으로 삼은 이모 테레사를 공격했다. 그의 군대는 포르투갈 백국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파괴한 뒤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은 뒤 테레사가 자신을 주군으로 섬기게 한 후 레온으로 돌아가 1128년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의 딸 베렝겔라와 결혼했다. 그러나 1128년 6월 24일 상 마메데 전투에서 테레사의 아들인 [[아폰수 1세|아폰수 엔히크스]]가 알폰소 7세에게 굴복했던 어머니 테레사와 페드로 페르난데스 등 레온-카스티야 왕국군 장성들을 물리치면서, 알폰소 7세가 복속시켰던 포르투갈 백국이 또다시 독립했다. 아폰수 엔히크스는 1129년에 자신을 포르투갈 [[프린스]]라 선언하며 알폰소 7세에 대항했고, 1139년에는 아예 포르투갈 국왕을 칭했다. 1130년 바르셀로나 백작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을 우려해 베렝겔라와의 결혼에 반대한 레온, 살라망카, 오비에도 주교들을 체포했다. 이에 귀족들은 대거 반발했고, 라라 백작이자 우라카 여왕의 애인이었던 페드로 곤살레스는 우라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드로 페레스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그들을 포섭해 반기를 들었다. 반란군은 한때 팔렌시아, 아스투리아스, 코얀사 등지에서 기세를 드높였지만, 오소리오 마르티네스가 이끄는 정부군에게 패배했다. 알폰소 7세는 그해 6월에 팔렌시아를 공략하여 페드로 곤살레스를 축출하고 나머지 반란자들과 화해했다. 1134년 아라곤과 팜플로나 국왕 알폰소 1세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는 자신이 팜플로나 대왕 [[안초 3세]]의 증손자이며 아라곤 왕국에도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아라곤과 팜플로나 귀족 모두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국왕을 독자적으로 세웠다. 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왕국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1135년 5월 26일 레온 대성당에서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이 행사에서 처남인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고, 팜플로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 톨로사 백작 알폰소 호르다네스, [[가스코뉴]] 및 프랑스 남부의 여러 영주들, 우르겔 백작 에르멘골 6세, 루에다 데 하온의 영주이자 사라고사의 마지막 타이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아들 아흐메드 알 무스탄시르 사이프 알 다울라(자파둘라)도 행사에 참석했다. 그러나 아라곤 국왕 [[라미로 2세]]와 포르투갈 [[프린스]] 아폰수 1세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렇듯 아라곤 왕국과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1137년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그의 처남인 라몬 베렝게르 4세가 라미로 2세의 딸 [[페트로닐라]]와 결혼한 뒤 장인이 수도원에 은퇴한 뒤 아라곤 왕국의 통치를 주관하게 되면서 양국의 사이가 극적으로 호전되었다. 반면 포르투갈 왕국과의 전쟁은 이어졌다. 아폰수는 집권 이래로 포르투갈의 '프린스'를 칭하면서 알폰소 7세의 인정을 받고자 사절을 여러 차례 보냈다. 그러나 알폰소 7세가 그를 반역자로 간주하며 조금도 인정하려 들자 않자, 아폰수는 그가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매듭지은 후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고 선제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1137년, 그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시아로 진격해 어머니의 옛 연인이었던 페드로 페르난데스 및 갈리시아 귀족들을 상대로 체르네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뒤 투이 등 일부 요새를 공략했다. 포르투갈과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던 알폰소 7세는 어쩔 수 없이 투이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에 따르면, 아폰수는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알폰소 7세의 충실한 친구가 될 것을 맹세했으며, 이번 전쟁에서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고, 무슬림 및 기독교 통치자와의 전쟁을 치르는 황제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한편 알폰소 7세는 그를 포르투갈 백작으로 인정하고 포르투갈을 다시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139년, [[무라비트 왕조]]의 에미르 알리 이븐 유수프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포르투갈로 쳐들어왔다. 아폰수는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을 이끌고 그들에 맞섰고, 그해 7월 25일 오우리케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그는 [[포르투갈 왕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군대와 성직자들의 추대를 받아 포르투갈 초대 국왕에 선임되었다. 레온 왕국의 알폰소 7세가 이 소식에 격분해 아폰수를 참칭자라고 비난하자, 아폰수는 투이 협약을 깨고 갈리시아를 침공해 [[미뉴 강]]을 건너 발데베스 계곡의 여러 성채를 공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 7세는 카스티야 백작들에게 나바라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를 방어하게 한 뒤 1140년 친히 대군을 이끌고 포르투갈로 출진해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여러 성채를 함락했다. 아폰수는 즉시 역습을 가하여 적군 선봉장 라미루 프로일라스 백작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은 뒤 발데베스 계곡에서 알폰소 7세와 본대와 대치했다. 《황제 알폰소의 연대기》에 따르면, 양자는 펜하 다 레이하 성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는데, 포르투갈 진영이 좀 더 높고 거친 지형에 자리잡았다. 이후 전투가 쉽게 결판나지 않고 양측의 여러 기사들이 생포되자, 포르투갈의 늙은 귀족들이 "기독교인끼리 무익한 전쟁을 이어간다면 무슬림들이 우리나라를 페허로 만들 것이니 이쯤에서 황제에게서 빼앗은 성들을 돌려주고 화친을 맺자"라고 제안했다. 아폰수는 그들의 진언에 따라 알폰소 7세에게 휴전을 제안했고, 알폰소 7세 역시 희생이 갈수록 커지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1143년, 알폰소 7세와 아폰수는 사모라 대성당에서 교황 대표 귀도 데 비코 추기경이 치켜보는 가운데 조약을 체결했다. 알폰소 7세는 아폰수가 포르투갈 국왕으로 군림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고, 양자는 그동안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다. 이후 [[레콩키스타]]에 전념하기로 한 그는 1138년 무라비트 왕조군을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1139년 오레자 요새를 공략했고 1142년에는 코리아를 공략했으며, 1144년에는 하옌과 코르도바를 점령했다. 여기에 알 안달루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모로코의 아틀라스 산맥 근처에서 발흥한 [[무와히드 왕조]]가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면서, 무라비트 왕조는 급격히 몰락했다. 1145년 3월, 사라고사의 왕자 자파둘라는 알 안달루스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로 마음먹고 알폰소 7세의 지원을 받아 그라나다를 공략했다. 그러다가 무라비트 왕조의 알 안달루스 총독 이븐 가니야의 반격으로 그라나다를 빼앗기자 알폰소 7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알폰소 7세는 지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자파둘라는 카스티야군과 갈등을 벌인 끝에 그들과 전쟁을 벌이다 1146년 2월 5일 친칠라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에 알폰소 7세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다가 이븐 가니야로부터 우베다와 바에사를 할양받고 충성 서약을 받은 뒤 철수했다. 카스티야 왕국의 권세가 갈수록 강해지자 위협을 느낀 메르톨라의 이븐 알 카시는 무와히드 왕조에 복속하며 원군을 요청했다. [[무와히드 왕조]]의 지도자 [[아브드 알 무민]]은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146년 5월 알헤시라스에 상륙했다. 무와히드군이 접근해오자, 이븐 가니야는 곧바로 무와히드 왕조에 항복했다. 이후 무와히드 왕조와 대치한 알폰소 7세는 1147년 알메리아 공략에 착수했다. 그는 이를 위해 [[나바라 왕국]]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아라곤 왕국의 실권자 라몬 베렝게르 4세, 제노바 공화국 함대와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에 응한 프랑스 [[십자군]]의 지원을 받았다. 그 결과 그해 10월 알메리아 공략에 성공하면서, 카스티야 왕국은 처음으로 지중해 해상에 진출할 수 있었다. 1150년 11월 나바라 왕국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가 사망하자, 알폰소 7세는 1151년 1월 27일 투딜렌에서 라몬 베렝게르 4세와 만나 나바라 왕국의 영역을 분할하기로 했다. [[안초 6세]]는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투딜렌 협약을 따르겠다고 맹세해야 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여동생 블랑카를 알폰소 7세의 장남인 산초와 결혼시킴으로써 알폰소 7세의 호의를 얻어내려 애썼다. 1153년 중반에는 소리아에서 알폰소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봉신 협약을 갱신했으며, 1157년 6월 2일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현재 팔렌시아)에서 알폰소 7세의 딸 산차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폰소 7세는 1157년 중순에 라몬 베렝게르 4세와 레리다에서 만나서 나바라 왕국을 분할하기 위한 새로운 협약을 맺었다. 1157년, 무와히드 왕조가 알메리아를 습격해 순식간에 탈환했다. 알폰소 7세는 알메리아를 재정복하기 위해 원정에 착수했으나 실패하고 귀환하던 중 8월 21일에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